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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적 추상화의 인지와 학습

by I Seul Bee

8부의 말미에서, 벡터공간과 위상공간, 측도공간이라는 현대 수학의 핵심 개념들이 대학 강의실에서는 흔히 역사적 발생 순서와 다른 순서로 가르쳐진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학생들은 대개 논리적으로 정돈된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하며, 그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왜 그러한 모습으로 정해졌는지는 나중에 깨닫거나 끝내 묻지 않은 채 강의실을 나서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수학 교육에 내재된 이 ‘순서’의 문제를 다룬다.

수학 교육을 연구하는 일은 흔히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만의 몫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이 연재를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라면 머릿속에 맴도는 몇 가지 질문이 있을 것이다. “ε-δ 논법은 왜 처음 배울 때 유난히 낯설고 고통스러운가?”, “함수의 개념은 어째서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나 형태를 바꾸어 가며 반복적으로 학습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한 분야가 바로 수학교육학이다. 따라서 이 글은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법 자체라기보다, 우리가 수학을 배우며 겪었던 경험을 해석하는 ‘인지적 도구’로서 교육 연구를 조명한다.

압축으로서의 추상화

위상수학자 윌리엄 서스턴(William Thurston)은 1990년 글 「Mathematical Education」에서 수학이 “놀라울 정도로 압축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씨름해 이해한 개념도 충분히 체화되고 나면 하나의 단위로 압축되어, 다음 사고 과정에서 한 단계처럼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Thurston1990] 미적분학의 기초를 익히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원리를 체득하고 나면 ‘미분’이라는 큰 추상적 조작을 매번 정의부터 되짚지 않고도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도 1911년 저서 An Introduction to Mathematics에서 비슷한 역설을 제시했다. 문명의 진보는 과거에는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했던 중요한 조작들을 생각하지 않고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수를 늘려 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Whitehead1911, Ch. 5] 구구단을 완전히 익힌 사람은 두 자리 수의 곱셈을 할 때마다 곱셈의 정의를 처음부터 떠올리지 않는다. 자동화는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주의력을 더 높은 수준의 문제에 쓸 수 있도록 해 준다.

수학적 추상화는 이러한 압축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조작이다. 앞서 군(group)의 이론을 다룰 때 살펴본 케일리 정리(Cayley’s theorem)를 떠올려 보자. 갈루아의 방정식 연구에서 군은 주로 근들의 치환 집합으로 나타났고, 19세기 군론은 치환군과 여러 변환군 같은 구체적 맥락에서 발전했다. 케일리는 1854년에 추상군 개념을 향한 초기 정식화를 제시했으며, 이후 공리적 군 개념이 정착하면서 원소의 정체가 아니라 결합법칙, 항등원, 역원이라는 구조만으로 보편적 증명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Kleiner1986] 그 결과 하나의 증명이 정수의 덧셈군, 기하학적 대칭군, 아직 만나지 못한 다른 군에도 함께 적용된다. 케일리 정리는 다시 모든 군을 어떤 대칭군의 부분군과 동형인 형태로 나타낼 수 있음을 보장한다. 학습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압축은 양날의 검과 같다. 일단 체화하면 많은 사례를 하나의 구조로 다룰 수 있지만, 체화하기 전에는 압축된 기호가 어떤 경험과 문제를 묶어 놓은 것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추상화가 일어나는 방식에 대한 이론

그렇다면 인간의 인지 과정에서 이러한 추상화와 개념 형성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인지발달 연구와 수학교육학은 여러 이론적 틀을 제시해 왔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세 가지를 살펴보자.

  • 인지발달 이론의 선구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특히 경험적 추상(empirical abstraction)과 반영적 추상(reflecting abstraction)을 구별했다. 경험적 추상은 대상에서 지각할 수 있는 성질을 뽑아내는 것이고, 반영적 추상은 주체가 대상에 수행한 행동과 그 행동들의 조정 관계를 다시 조직하는 것이다. 여러 물체를 세는 활동에서 순서와 일대일 대응 같은 조작의 구조를 구성해 가는 일이 후자의 예가 될 수 있다. 피아제의 구성주의적 설명에서 논리·수학적 지식은 물리적 대상의 성질을 단순히 복사한 결과라기보다, 행위와 조작의 조정을 반성하고 재조직하며 구성된다.
  • 안나 스파드(Anna Sfard)는 1991년 논문에서 수학적 개념을 과정으로 보는 조작적 파악(operational conception)과 대상으로 보는 구조적 파악(structural conception)을 구별했다. 전자는 개념을 ‘무엇을 어떻게 계산하는가’라는 동적인 절차로 이해하고, 후자는 그 과정을 그 자체로 완결된 대상으로 다룬다. 스파드는 과정적 관념이 대상적 관념으로 전환되는 인지적 변화를 실체화(reification)라고 불렀다.
  • 데이비드 톨(David Tall)과 슐로모 비너(Shlomo Vinner)는 1981년 논문에서 개념 이미지(concept image)와 개념 정의(concept definition)를 구별했다. ‘개념 이미지’는 어떤 개념과 연관되어 개인의 마음속에 형성된 그림, 사례, 성질, 절차 등의 전체 인지 구조이며, 반드시 일관적이지는 않다. ‘개념 정의’는 개인이 말로 표현하는 정의를 뜻하고, 이 가운데 수학 공동체가 승인한 정의를 형식적 개념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이 교과서의 정의를 정확히 재현하더라도 실제 문제에서는 제한된 개념 이미지에 의존할 수 있으며, 두 구조 사이의 잠재적 충돌이 특정 상황에서 오류로 드러나기도 한다.[TallVinner1981]

[스파드의 연구와 비슷한 시기에 에드 두빈스키(Ed Dubinsky)와 동료들은 피아제의 반영적 추상을 대학 수학 학습에 적용하며 APOS 이론을 발전시켰다. APOS는 외적 지시에 따라 수행하는 행동(Action)이 내면화되어 과정(Process)이 되고, 그 과정이 하나의 대상(Object)으로 캡슐화되며, 관련 행동·과정·대상들이 스키마(Schema)로 조직되는 인지적 구성을 설명한다. 다만 이는 모든 학습자가 반드시 고정된 네 단계를 직선적으로 통과한다는 뜻은 아니다.[ArnonEtAl2014]]

세 가지 사례

이 교육학적 이론들이 실제 수학 개념의 학습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세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 첫 번째 사례는 함수(function) 개념이다.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는 1748년 Introductio in analysin infinitorum에서 함수를 변수와 상수로 이루어진 ‘해석적 표현식’으로 정의했지만, 1755년에는 한 양이 다른 양에 의존한다는 더 넓은 표현을 사용했다. 진동하는 현과 푸리에 급수를 둘러싼 논의를 거치며 단일한 식으로 주어지지 않는 함수가 중요해졌고, 디리클레(Dirichlet)의 1837년 논의는 구간의 각 \(x\)에 값이 정해지면 하나의 해석식이 없어도 된다는 관점을 분명히 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 확장은 학생이 함수를 식, 그래프, 변화 과정, 대응으로 점차 넓게 이해하는 과정과 흥미로운 유사성을 보인다. 실제로 톨과 비너는 교사가 일반적 정의를 제시한 뒤에도 예제를 거의 식으로만 다루면 학생의 개념 이미지가 ‘함수는 식’이라는 범위에 머물 수 있다고 지적했다.[TallVinner1981]
  • 두 번째 사례는 \(0.999\ldots=1\)이라는 등식에 대한 학습자의 저항이다. 무한소수는 어느 시점에도 끝나지 않은 표기 과정이 아니라 부분합 수열의 극한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 0.999\ldots=\sum_{n=1}^{\infty}\frac{9}{10^n} =\frac{9/10}{1-1/10}=1 \] 이다. 각 유한 부분합이 1보다 작다는 사실과 그 부분합들의 극한이 1이라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스파드의 틀로 해석하면, \(0.999\ldots\)를 ‘9를 계속 붙이는 미완의 행동’으로만 볼 때에는 등호가 부자연스럽지만, 그 과정을 극한이라는 하나의 수학적 대상으로 다룰 수 있게 되면 등식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이 사례는 과정적 파악이 구조적 파악으로 전환되는 실체화 과정의 핵심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 세 번째 사례는 오늘날 실수값 함수 \(f:D\to\mathbb R\)가 \(x_0\in D\)에서 연속임을 나타내는 ε-δ 정의이다. \[ \forall\varepsilon>0\ \exists\delta>0\ \forall x\in D\, \left(|x-x_0|<\delta\ \Longrightarrow\ |f(x)-f(x_0)|<\varepsilon\right) \] 학습상의 한 가지 핵심 난점은 두 한정사의 의존 관계이다. 임의의 \(\varepsilon\)가 먼저 주어지고 그 값에 맞는 \(\delta\)를 선택해야 하며, 순서를 뒤바꾸면 더 강하고 다른 명제가 된다. 학생의 개념 이미지에는 흔히 “\(x\)가 가까워지면 함숫값도 가까워진다”는 정성적 그림만 있고 허용오차 선택의 순서는 들어 있지 않다. 톨과 비너는 극한과 연속성에서 이러한 개념 이미지와 형식적 정의 사이의 잠재적 충돌, 그리고 ‘모든’과 ‘어떤’ 같은 한정사 사용의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논했다.[TallVinner1981]

새수학 운동

학교수학을 현대화하고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려는 여러 개혁은 흔히 새수학 운동(New Math Movement)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통일된 교육과정이라기보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여러 나라에서 전개된 다양한 개혁의 묶음이었다. 미국에서도 1957년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이전부터 여러 중등 수학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푸트니크 발사는 과학교육에 대한 위기감을 고취하고 대대적인 재정 지원을 이끌어낸 결정적 계기였다.[Kilpatrick2012][Phillips2014]

1959년 유럽경제협력기구(OEEC)가 프랑스 루아요몽에서 연 중등 수학교육 세미나에서 장 디외도네(Jean Dieudonné)는 전통적인 종합기하가 교육과정에서 차지하던 중심적 지위를 비판하고, 선형대수와 벡터공간을 비롯한 현대 수학의 언어를 더 적극적으로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공식 보고서에 실린 강연문은 그의 구상을 “Euclid must go!”라는 말로 요약한다.

[현장에서 외쳤다고 후대 문헌에 전해지는 프랑스어 구호와 달리, 1961년 공식 보고서의 영어 강연문에는 “Euclid must go!”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디외도네는 기하학의 중요성 자체를 부정했다기보다 당시 중등학교에서 종합기하가 차지하던 방식과 비중을 비판했다.[OEEC1961, pp. 31–46]]

디외도네가 부르바키(Bourbaki)의 창립 구성원이었고 그가 제안한 집합, 사상, 구조의 언어가 부르바키식 수학관과 밀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제적 새수학 전체가 부르바키가 설계한 하나의 교육운동이었던 것은 아니며, 미국과 유럽의 여러 사업은 목표와 교수법도 달랐다.

미국에서는 1958년 국립과학재단의 지원 아래 에드워드 베글(Edward G. Begle)이 이끄는 학교수학연구회(SMSG, School Mathematics Study Group)가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중등과정 개혁이 중심이었지만 곧 초등과정도 개발했으며, 실제 초등 교재에는 집합 언어, 여러 진법, 산술 연산의 성질, 직관기하 등이 들어갔다. 예를 들어 SMSG의 4학년 교재는 합집합·교집합의 기호와 5진법을 다루었다.[SMSG1962]

대표적인 비판자 가운데 모리스 클라인(Morris Kline)은 1973년 Why Johnny Can’t Add: The Failure of the New Math에서 새수학이 추상적 구조와 전문용어를 너무 일찍 제시하고 계산, 응용, 역사적 동기를 소홀히 한다고 주장했다.[Kline1973]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1964년 캘리포니아주 교육과정위원회 위원으로서 1–8학년용 수학 교과서를 심사했고, 이듬해 발표한 글에서 목적과 쓰임을 설명하지 않는 집합 용어, 불필요하게 현학적인 ‘정확한’ 표현, 여러 진법의 기계적 반복을 비판했다. 동시에 그는 계산을 폐기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해결법을 허용하는 유연한 사고와 기본 연산의 숙달을 함께 요구했다.[Feynman1965]

[파인만의 동시대 1차 출처는 1965년 3월 Engineering and Science에 실린 「New Textbooks for the “New” Mathematics」이다. 글 첫머리에서 그는 위원회 활동이 ‘지난해’, 곧 1964년이었다고 명시한다. 1985년 회고록 Surely You’re Joking, Mr. Feynman!의 「Judging Books by Their Covers」는 같은 경험을 훗날 일화 형식으로 되짚은 글이다.[Feynman1965][FeynmanLeighton1985]]

한국에서는 제3차 수학과 교육과정이 새수학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반영했다. 제4차 수학과 교육과정은 새수학의 취지를 전면 폐기한 것이 아니라 일부 유지하면서, 내용의 조기 도입과 수학적 구조·논리적 엄밀성의 지나친 강조를 완화하고 학습 내용의 양과 수준을 조정했다.[Han1999]

[제3차 국가 교육과정은 학교급별로 한꺼번에 공포된 것이 아니다. 국민학교 교육과정은 1973년 2월 14일, 중학교 교육과정은 같은 해 8월 31일,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1974년 12월 31일에 각각 공포되었다. 제4차 교육과정은 모든 학교급에 대해 1981년 12월 31일 고시되었다.[NationalArchivesKorea]]

실패로부터 얻은 교훈

1970년대에 들어 새수학이라는 표어 아래 추진된 여러 개혁은 거센 반발 속에서 축소되었다. 즉, 비십진법 계산 연습,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하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대수, 과도한 집합론 용어 사용이 축소되었다. 함수와 관계의 언어, 연산의 성질, 확률·통계, 좌표와 변환기하처럼 이후 교육과정에 남은 요소도 있다.[Kilpatrick2012]

한스 프로이덴탈(Hans Freudenthal)은 새수학에 대한 비판이 널리 확산되기 전인 1963년부터 반교수학적 전도(anti-didactical inversion)라는 표현을 사용했다.[Freudenthal1963] 이는 연구와 탐구의 끝에서 얻어진 정의·공리·정리의 정돈된 체계를 학습의 출발점으로 뒤집어 놓는 일을 뜻한다. 힐베르트의 기하학 공리계나 현대의 군 공리처럼 오랜 탐구 끝에 정제된 결과를, 그 정의가 필요해지는 문제와 조직화의 활동 없이 먼저 부과하면 학생은 기호가 무엇을 압축하는지 알기 어렵다. 프로이덴탈의 대안은 실제 수학사의 모든 시행착오를 그대로 반복하거나 언제나 물리적 구체물에서만 시작하라는 규칙이 아니라, 교사의 안내 아래 학습자가 문제를 수학화하고 개념을 재구성하는 안내된 재발명(guided reinvention)이었다.[Freudenthal1973]

그러나 반교수학적 전도에 대한 비판에서 ‘구체적인 표상은 언제나 추상적인 표상보다 교육적으로 우월하다’는 보편 법칙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제니퍼 카민스키(Jennifer A. Kaminski), 블라디미르 슬라우츠키(Vladimir M. Sloutsky), 앤드루 헤클러(Andrew F. Heckler)는 2008년 Science에 발표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3차 가환군과 같은 구조를 가르쳤다. 첫 실험의 참가자 80명은 추상적 기호 사례 하나를 배우는 조건과, 계량컵의 액체·피자 조각·용기 속 테니스공을 이용한 구체적 사례를 하나·둘·셋 배우는 세 조건, 모두 네 조건에 배정되었다. 네 조건은 훈련 단계의 점수와 학습 시간에서는 차이가 없었지만, 같은 구조를 낯선 어린이 놀이에 적용하는 전이 검사에서는 추상적 기호 조건이 세 구체적 조건보다 높은 성취를 보였다. 저자들은 구체적 맥락의 부수 정보가 구조의 인식과 전이를 제약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후속 연구는 그 해석에 중요한 조건을 덧붙였다. 드복(Dirk De Bock) 등은 2011년 원래와 유사한 추상적 전이 검사에서는 카민스키 등의 점수 양상을 재현했지만, 구체적 표상으로 배운 참가자도 유사한 구체적 맥락으로는 잘 전이했으며 질적 자료 역시 추상 조건의 학습 내용을 단순하게 해석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보고했다.[DeBockEtAl2011] 트르니니치(Dragan Trninic) 등은 2020년 계량컵 표상을 수학적 구조와 더 잘 대응시키고 과제의 맥락을 정렬한 비판적 재현에서 추상적 사례의 전이 우위가 사라지고 구체적 사례가 초기 학습에서 더 유리한 결과를 얻었다.[TrninicEtAl2020] 따라서 핵심은 구체성과 추상성의 이분법 자체라기보다 표상이 목표 구조와 얼마나 잘 대응하는지, 부수 정보가 무엇인지, 전이 검사가 어떤 표상으로 제시되는지에 있다.

한 가지 절충적 설계가 구체성 점감(concreteness fading)이다. 이는 친숙한 구체적 표상에서 시작하되 표상들 사이의 대응을 명시적으로 연결하면서 그림이나 도식 같은 중간 표상을 거쳐 일반적인 기호로 옮겨 가는 방식이다. 여러 실험에서 이 순서가 구체적 표상만 또는 추상적 표상만 사용하는 조건보다 전이에 유리한 경우가 보고되었다. 그러나 체계적 문헌 검토는 그 효과가 학습자의 사전 지식, 구체물의 설계, 표상 간 연결의 명료성, 과제와 평가 방식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구체성 점감은 구체와 추상을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유망한 교수학적 설계 원리이다.[FyfeEtAl2014]

세 가지 순서

지금까지 살펴본 인지적 이론과 역사적 사례를 종합하면, 수학의 ‘논리적 순서’와 ‘역사적 순서’, 그리고 인간의 ‘학습 순서’는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 논리적 순서: 완성된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하여 연역을 통해 정리로 나아가는 구조적 순서이다. 앞선 글에서 벡터공간의 추상적 공리계를 제시하고 차원 정리 등 여러 성질을 연역한 서술 방식이 여기에 속한다.
  • 역사적 순서: 여러 시대와 지역의 수학자들이 문제를 풀고 개념을 고치며 실제로 남긴 복잡한 궤적이다.
  • 학습의 순서: 한 개인이 선행 지식, 표상, 과제, 교사의 안내를 바탕으로 낯선 개념을 구성해 가는 경로이다. 논리적 순서나 역사적 순서와 겹치는 부분은 있지만 어느 하나를 그대로 복제하지는 않는다.

1960년대 새수학의 일부 교육과정은 완성된 수학의 ‘논리적 순서’를 학생의 ‘학습 순서’로 너무 직접 옮기는 부작용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수학자들이 실제로 헤맸던 길고 복잡한 ‘역사적 순서’를 교실에서 그대로 재현하는 것 역시 정답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개념의 논리적 구조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학습자가 그 구조를 필요로 하고 조직할 수 있는 과제와 표상을 설계하는 일이다.

이러한 결론은 본 연재의 제3부, 즉 벡터공간, 위상공간, 측도공간을 다룬 세 편의 글이 대학 강의실의 전형적인 진도와 왜 달라 보이는지도 설명해 준다. 앞선 글들은 역사적 동기와 구체적 문제를 먼저 보여 준 뒤 공리적 구조로 나아가는 서술을 의도했다. 이 과정에는 길이와 넓이, 점집합, 함수열, 미분과 적분의 관계를 둘러싼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대학 교육의 순서 역시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추상대수 강좌는 벡터공간의 공리를 먼저 제시한 뒤 \(\mathbb R^n\)과 함수공간을 사례로 다루기도 하지만, 선형대수 입문에서는 좌표와 연립방정식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일반위상수학은 위상공간을 먼저 정의하고 거리로부터 생기는 위상을 사례로 설명하지만, 해석학 강좌는 거리공간을 먼저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 우리는 추상화된 개념이 수용되고 학습되는 장소, 즉 ‘강의실’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수학적 추상화는 강의실 밖, 새로운 정리가 증명되는 연구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수행된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서는 “이론을 어디까지 추상화하여 밀어붙일 것인가” 자체를 두고 수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10부에서는 강의실을 떠나 바로 이 논쟁이 벌어지는 연구 현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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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ninicEtAl2020] Trninic, D., Kapur, M., & Sinha, T. (2020). The disappearing “advantage of abstract examples in learning math.” Cognitive Science, 44(7), e12851. https://doi.org/10.1111/cogs.12851.
  • [Whitehead1911] Whitehead, A. N. (1911). An Introduction to Mathematics. Henry Holt. Project Gutenberg.

저작권

이슬비, 2026. designeralice@daum.net.

수학적 추상화

  1. 수학적 추상화의 기본 개념
  2. 초기 수학에서의 암묵적 추상화
  3. 대수적 기호와 연산 법칙
  4. 공리적 방법에 의한 추상화
  5. 수학적 구조와 범주론
  6. 벡터공간과 선형 구조
  7. 거리공간과 위상공간
  8. 측도공간과 확률공간
  9. 수학적 추상화의 인지와 학습
  10. 현대 수학 연구에서의 추상화
  11. 수학적 추상화의 방법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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