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의 말미에서 예고했듯, 이제 시선을 구체적인 수학 강의실로 옮겨 보자. 연립일차방정식, 기하학의 방향량, 수열, 다항식, 함수, 미분방정식의 해에서 오늘날 우리가 ‘선형성’이라고 부르는 계산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행렬식과 \(n\)차원 기하학, 그라스만의 확장론처럼 여러 선형 문제를 잇는 시도도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이 흐름들을 유한차원과 무한차원에 두루 적용되는 하나의 공리적 언어로 조직한 벡터공간 이론은 20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야 널리 자리 잡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진적인 통합 과정과, 서로 다른 사례를 하나의 구조로 다룰 때 얻는 수학적 이점을 살펴본다.[Dorier1995][Moore1995]
흩어져 있던 사례들
오늘날 ‘가우스 소거법’이라고 부르는 연립일차방정식의 소거 절차를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가 처음 발명한 것은 아니다. 소거법은 가우스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사용되었고, 근세 유럽에서도 18세기 말까지 통상적인 대수 계산법으로 자리 잡았다. 가우스는 1809년 천체 궤도와 최소제곱 문제를 다루면서 정규방정식에 소거법을 적용하고, 대칭적인 계산에 알맞은 표기와 반복 계산 방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실무가 후대의 계산법에 큰 영향을 주면서 그의 이름이 소거법과 결합했지만, ‘Gaussian elimination’이라는 명칭 자체는 20세기에 정착했다. 당시 이 계산은 연립방정식 해법과 최소제곱 계산이라는 실용적인 맥락에서 발전해 나갔다.[Grcar2011]
기하학적 벡터의 역사에는 사원수(quaternion)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원수 \(q=a+bi+cj+dk\)에서 실수부가 \(0\)인 \(bi+cj+dk\)는 순허수 사원수이며, 좌표 \((b,c,d)\)를 통해 3차원 유클리드 벡터와 대응시킬 수 있다. 표준적인 방향 규약을 택하면 두 순허수 사원수 \(u,v\)의 곱은 \[ uv=-u\mathbin{\cdot}v+u\times v \] 처럼 스칼라 부분과 벡터 부분으로 분해된다. 1880년대에 조사이어 윌러드 깁스(Josiah Willard Gibbs)와 올리버 헤비사이드(Oliver Heaviside)는 사원수와 그라스만의 연구에서 영향을 받되 서로 상당 부분 독립적으로, 내적과 외적을 별개의 연산으로 다루는 현대 벡터 해석의 핵심 체계를 발전시켰다.
[깁스와 헤비사이드의 벡터 해석은 1890년대에 사원수 체계 전체를 유지하려던 진영과 공개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는 단순한 기호 선택을 넘어, 물리학과 기하학에 어떤 대수 체계가 더 적합한가를 둘러싼 경쟁이었다.[Crowe1994]]
깁스와 헤비사이드의 벡터 해석은 주로 3차원 물리 공간을 위한 계산법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모든 일반화가 3차원 화살표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라스만은 이미 임의 차원의 확장량을 연구했고, 수열, 다항식, 함수에서도 덧셈과 상수배를 이용한 선형적 방법이 각 분야 안에서 쓰이고 있었다. 미분방정식에서는 조건을 더 분명히 해야 한다. 선형 미분연산자 \(L\)에 대한 동차 선형방정식 \(L[y]=0\)에서는 \(L[y_1]=L[y_2]=0\)일 때 모든 스칼라 \(\alpha,\beta\)에 대하여 \(L[\alpha y_1+\beta y_2]=0\)이므로 해집합이 벡터공간을 이룬다.
페아노의 이른 공리화
이러한 일반화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인물은 이탈리아 수학자 주세페 페아노(Giuseppe Peano)이다. 페아노는 1888년 “H. 그라스만의 확장론에 따른 기하 계산, 연역논리의 연산을 앞세워”(Calcolo geometrico secondo l'Ausdehnungslehre di H. Grassmann, preceduto dalle operazioni della logica deduttiva)를 출판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대상의 구체적인 본성을 미리 정하지 않은 ‘선형계’(sistema lineare)를 정의했다. 그 원소들에는 덧셈과 실수에 의한 스칼라배가 주어지고, 이 연산들은 오늘날의 실벡터공간 공리와 본질적으로 같은 법칙을 만족한다.
[그레고리 H. 무어(Gregory H. Moore)의 1995년 논문 “선형대수학의 공리화, 1875–1940”(The Axiomatization of Linear Algebra: 1875–1940)은 실제로 존재하며, 페아노의 1888년 정의에서 20세기 전반의 벡터공간 이론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한 표준적인 수학사 연구다.[Moore1995]]
그라스만은 1844년 “선형 확장론”(Die lineale Ausdehnungslehre, ein neuer Zweig der Mathematik)에서 임의 차원을 갖는 체계, 일차독립, 생성과 차원에 가까운 개념, 오늘날의 교환정리에 해당하는 결과와 외적의 전신을 발전시켰다. 페아노는 이 전통을 더 명시적인 공리적 형식으로 재구성했다.[Dorier1995][FearnleySander1979]
그라스만의 1844년 저술은 철학적 언어와 낯선 형식, 높은 일반성 때문에 읽기 어려웠고 즉각적인 반응도 제한적이었다.
바나흐와 함수해석
20세기 초 적분방정식과 무한급수, 함수열을 연구하던 해석학자들은 함수 전체의 집합을 하나의 공간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이 흐름에는 힐베르트, 프레셰, 리스의 선행 연구가 있었고, 1920년 전후에는 바나흐, 한, 위너와 뇌터 등이 서로 다른 문제에서 벡터공간에 가까운 공리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폴란드의 수학자 스테판 바나흐(Stefan Banach)는 1920년에 제출한 박사논문의 성과를 1922년 논문 “추상 집합에서의 연산과 적분방정식으로의 응용”(Sur les opérations dans les ensembles abstraits et leur application aux équations intégrales)으로 출판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오늘날의 완비 노름 실벡터공간에 해당하는 추상 공간을 공리적으로 다루고, 그 위의 연산과 적분방정식에 적용되는 일반 정리들을 연구했다. 대수적인 벡터공간 구조에 노름과 완비성을 결합함으로써 함수와 수열의 공간을 공통된 해석학적 대상으로 다룰 수 있는 틀이 선명해졌다.[Banach1922][Pietsch2007]
[‘바나흐공간’이라는 명칭은 바나흐 자신의 1922년 논문 제목에 등장하지 않는다. 문헌사를 정리한 피취에 따르면 프레셰가 1928년에 ‘바나흐 씨의 공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그 뒤 이 명칭이 정착했다.[Pietsch2007]]
벡터공간의 정의와 그 사례
정의: 벡터공간
체(field) \(F\) 위의 집합 \(V\)에 두 연산, 즉 벡터 덧셈 \(+:V\times V\to V\)와 스칼라배 \(\cdot:F\times V\to V\)가 정의되어 있고 다음 조건들을 만족한다고 하자.
- \(V\)는 덧셈에 관하여 아벨군(가환군)이다. 즉 덧셈은 결합법칙과 교환법칙을 만족하고, 덧셈 항등원 \(0\in V\)와 각 \(v\in V\)의 덧셈 역원 \(-v\in V\)가 존재한다.
- 임의의 \(\alpha,\beta\in F\)와 \(v\in V\)에 대하여 \(\alpha(\beta v)=(\alpha\beta)v\)이고 \(1v=v\)이다.
- 임의의 \(\alpha,\beta\in F\)와 \(v,w\in V\)에 대하여 \(\alpha(v+w)=\alpha v+\alpha w\) 및 \((\alpha+\beta)v=\alpha v+\beta v\)이다.
이 조건들을 모두 만족하면 \(V\)를 체 \(F\) 위의 벡터공간(vector space)이라 하고, \(V\)의 원소를 벡터(vector)라고 한다.
이 정의를 만족하는 대표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 체 \(F\)의 원소로 이루어진 \(n\)-튜플 공간 \(F^n\) (성분별 덧셈과 스칼라배)
- 차수가 \(n\) 이하인 다항식 공간 \(P_n(F)=\{a_0+a_1x+\cdots+a_nx^n:a_i\in F\}\)
- 수열공간 \(F^{\mathbb N}\) (점별 덧셈과 스칼라배)
- 닫힌구간 \([a,b]\) 위의 연속함수 공간 \(C([a,b],F)\) (점별 덧셈과 스칼라배)
- 동차 선형 미분방정식의 실수값 해공간 \(\{y\in C^2(\mathbb R,\mathbb R):y''+y=0\}\)
이 사례들은 원소의 구체적인 모습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 벡터공간이다.
왜 통합이 이득인가
실수값 해를 생각하여 \[ V=\{y\in C^2(\mathbb R,\mathbb R):y''+y=0\} \] 라고 하자. \(L:C^2(\mathbb R,\mathbb R)\to C(\mathbb R,\mathbb R)\), \(L(y)=y''+y\)는 선형사상이고 \(V=\ker L\)이므로 \(V\)는 벡터공간이다.
[모든 \(y\in V\)가 유일하게 \(y=c_1\cos x+c_2\sin x\)로 표현된다는 사실은 상미분방정식론의 표준 결과다. 초기값 존재·유일성 정리로도 이를 볼 수 있다. 초기값 사상 \(E:V\to\mathbb R^2\), \(E(y)=(y(0),y'(0))\)는 선형이고, 각 \((a,b)\in\mathbb R^2\)에 대하여 해당 초기값을 갖는 해가 유일하게 존재한다. 실제로 그 해는 \(a\cos x+b\sin x\)이므로 \(E\)는 선형동형사상이다.[Teschl2012]]
두 함수 \(\cos x\)와 \(\sin x\)는 일차독립이다. 실제로 \(c_1\cos x+c_2\sin x=0\)이 모든 실수 \(x\)에서 성립한다고 가정하면, \(x=0\)에서 \(c_1=0\)을 얻고 \(x=\pi/2\)에서 \(c_2=0\)을 얻는다. 따라서 \(\{\cos x,\sin x\}\)는 \(V\)의 기저이고 \(\dim V=2\)이다.
벡터공간이라는 추상 언어의 이점은 함수의 해집합에 대한 ‘기저’와 ‘차원’을 기하 벡터에 사용하던 것과 동일한 정의와 정리로 다룰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 차원을 정의하고, 차원이 같은 유한차원 벡터공간들이 정확히 같은 대수 구조를 갖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유한차원의 분류
벡터공간 \(V\)의 부분집합 \(S\)에 대하여, \(S\)의 원소들을 사용한 모든 유한 일차결합의 집합을 \(S\)의 생성공간(span)이라고 부른다. \(\operatorname{span}(S)=V\)이면 \(S\)가 \(V\)를 생성한다고 말한다. 한편 \(S\)의 서로 다른 유한 개 원소 \(v_1,\ldots,v_m\)에 대해 \[ c_1v_1+\cdots+c_mv_m=0 \] 이면 반드시 \(c_1=\cdots=c_m=0\)일 때 \(S\)가 일차독립(linearly independent)이라고 한다. \(S\)가 \(V\)를 생성하면서 일차독립이면 \(S\)를 \(V\)의 기저(basis), 무한급수로 정의되는 다른 종류의 기저와 구별할 때는 하멜 기저(Hamel basis)라고 한다. 유한한 기저를 갖는 공간을 유한차원(finite-dimensional) 벡터공간이라고 한다.
기저를 구성하는 원소의 개수를 차원이라 부르려면, 한 벡터공간의 서로 다른 두 유한 기저가 항상 같은 수의 원소를 갖는다는 사실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 이를 보장하는 결과가 다음 교환 보조정리이다.
정리: 슈타이니츠 교환 보조정리 (유한 리스트 형태)
벡터공간 \(V\)에서 유한 리스트 \((v_1,\ldots,v_m)\)이 \(V\)를 생성하고 다른 유한 리스트 \((w_1,\ldots,w_n)\)이 일차독립이면 \(n\le m\)이다. 더 나아가 \(v\)들의 순서를 적절히 바꾸어
\[
(w_1,\ldots,w_n,v_{n+1},\ldots,v_m)
\]
이 \(V\)를 생성하게 할 수 있다.
증명을 위해 \(0\le k\le\min(m,n)\)인 각 \(k\)에 대하여, 아직 남아 있는 \(v\)들의 순서를 필요에 따라 바꾸면 \[ (w_1,\ldots,w_k,v_{k+1},\ldots,v_m) \] 이 \(V\)를 생성한다는 주장을 귀납법으로 보이자.
\(k=0\)일 때는 \((v_1,\ldots,v_m)\)이 \(V\)를 생성한다는 가정과 같다. 이제 \(k-1\)일 때 \[ (w_1,\ldots,w_{k-1},v_k,\ldots,v_m) \] 이 \(V\)를 생성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w_k\)도 이 리스트의 일차결합이므로 \[ w_k=c_1w_1+\cdots+c_{k-1}w_{k-1}+d_kv_k+\cdots+d_mv_m \] 으로 쓸 수 있다. 계수 \(d_k,\ldots,d_m\)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0\)이 아니다. 모두 \(0\)이라면 \(w_k\)가 \(w_1,\ldots,w_{k-1}\)의 일차결합이 되어 \((w_1,\ldots,w_n)\)의 일차독립성과 모순이기 때문이다.
\(d_j\ne0\)인 어떤 \(j\ge k\)를 고른 뒤, 아직 남아 있는 \(v_j\)와 \(v_k\)의 이름만 맞바꾸면 \(d_k\ne0\)이라고 둘 수 있다. 위 등식을 \(v_k\)에 대하여 풀면 \[ v_k=\frac{1}{d_k}\left(w_k-c_1w_1-\cdots-c_{k-1}w_{k-1}-d_{k+1}v_{k+1}-\cdots-d_mv_m\right) \] 을 얻는다. 따라서 기존 생성 리스트에서 \(v_k\)를 \(w_k\)로 바꾸어도 \(V\) 전체를 생성한다. 귀납적으로 \[ (w_1,\ldots,w_k,v_{k+1},\ldots,v_m) \] 이 \(V\)를 생성한다.
이제 \(n>m\)이라고 가정하자. 위 주장을 \(k=m\)에 적용하면 \((w_1,\ldots,w_m)\)만으로 \(V\)를 생성한다. 따라서 \(w_{m+1}\)은 이들의 일차결합인데, 이는 \((w_1,\ldots,w_n)\)이 일차독립이라는 가정과 모순이다. 그러므로 \(n\le m\)이다. 또한 \(n\le m\)인 경우 귀납 주장을 \(k=n\)까지 적용하면 보조정리의 더 강한 생성 결론도 얻는다.
이제 \(V\)에 두 기저 \((v_1,\ldots,v_m)\)과 \((w_1,\ldots,w_n)\)이 있다고 하자. 첫 번째 기저는 생성 리스트이고 두 번째 기저는 일차독립 리스트이므로 \(n\le m\)이다. 역할을 바꾸면 \(m\le n\)도 성립하므로 \(m=n\)이다. 따라서 한 유한차원 벡터공간의 모든 기저는 같은 수의 원소를 갖는다. 이 공통값을 \(V\)의 차원(dimension)이라 하고 \(\dim V\)로 쓴다.
두 벡터공간 \(V,W\) 사이의 함수 \(\varphi:V\to W\)가 임의의 \(v,v'\in V\)와 \(\alpha\in F\)에 대하여 \[ \varphi(v+v')=\varphi(v)+\varphi(v'),\quad \varphi(\alpha v)=\alpha\varphi(v) \] 를 만족하면 \(\varphi\)를 선형사상(linear map)이라고 부른다. 전단사인 선형사상을 동형사상(isomorphism)이라 하고, 그러한 사상이 존재하는 두 벡터공간을 서로 동형이라고 한다.
정리: 유한차원 벡터공간의 분류
같은 체 \(F\) 위의 두 유한차원 벡터공간 \(V,W\)가 서로 동형일 필요충분조건은
\[
\dim V=\dim W
\]
인 것이다.
먼저 \(\dim V=\dim W=n\)이라고 가정하고 각각의 기저 \((v_1,\ldots,v_n)\), \((w_1,\ldots,w_n)\)을 잡자. 기저의 생성성과 일차독립성 때문에 \(V\)의 모든 벡터는 \[ v=c_1v_1+\cdots+c_nv_n \] 으로 유일하게 표현된다. 따라서 \[ \varphi(c_1v_1+\cdots+c_nv_n)=c_1w_1+\cdots+c_nw_n \] 으로 \(\varphi:V\to W\)를 잘 정의할 수 있다. 좌표의 덧셈과 스칼라배가 체 \(F\)의 연산에 따라 성분별로 이루어지므로 \(\varphi\)는 선형이다. \((w_1,\ldots,w_n)\)이 \(W\)를 생성하므로 \(\varphi\)는 전사이고, 이 리스트가 일차독립이므로 \(\varphi(v)=0\)이면 \(v=0\)이다.
[선형사상 \(T:V\to W\)는 \(\ker T=\{0\}\)일 때 그리고 그때에만 단사이다. 실제로 \(T(v)=T(w)\)이면 \(T(v-w)=0\)이므로 \(\ker T=\{0\}\)일 때 \(v=w\)이다. 반대로 \(T\)가 단사이면 \(T(v)=0=T(0)\)에서 \(v=0\)이다.]
따라서 \(\varphi\)는 전단사 선형사상이고 \(V\)와 \(W\)는 동형이다. 역으로 \(V\)와 \(W\) 사이에 동형사상 \(\varphi:V\to W\)가 있고 \((v_1,\ldots,v_n)\)이 \(V\)의 기저라고 하자. \(\varphi\)의 전사성 때문에 \((\varphi(v_1),\ldots,\varphi(v_n))\)은 \(W\)를 생성한다. 또한 \[ c_1\varphi(v_1)+\cdots+c_n\varphi(v_n)=0 \] 이면 선형성으로 \(\varphi(c_1v_1+\cdots+c_nv_n)=0\)이고, \(\varphi\)의 단사성과 \((v_1,\ldots,v_n)\)의 일차독립성 때문에 모든 \(c_i=0\)이다. 그러므로 \((\varphi(v_1),\ldots,\varphi(v_n))\)은 \(W\)의 기저이고 \(\dim W=n=\dim V\)이다.
이 정리는 같은 체 위의 유한차원 벡터공간을 벡터공간으로서 분류하는 정보가 차원 하나뿐임을 말한다. 예를 들어 \(P_n(\mathbb R)\)의 표준 기저는 \((1,x,\ldots,x^n)\)이므로 차원이 \(n+1\)이고, \[ a_0+a_1x+\cdots+a_nx^n\longmapsto(a_0,a_1,\ldots,a_n) \] 은 \(P_n(\mathbb R)\)과 \(\mathbb R^{n+1}\) 사이의 명시적인 선형동형사상이다. 앞의 미분방정식 해공간도 \((\cos x,\sin x)\)를 기저로 가지므로 \(\mathbb R^2\)와 동형이다. 추상화는 어떤 구조를 보존하고 어떤 구조를 잊었는지 분명히 할 때 정확한 힘을 발휘한다.
무한차원으로 가는 사다리
무한차원 벡터공간은 유한한 하멜 기저를 갖지 않는 공간이다. 하멜 기저에서는 각 벡터가 언제나 유한 일차결합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함수해석학에서 중요한 푸리에 급수, 함수열의 극한, 무한합을 다루려면 벡터공간의 대수 공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수열이 서로 가까워지는지, 그 극한이 공간 안에 머무는지를 말해 주는 노름이나 위상 같은 추가 구조가 필요하다.[HunterNachtergaele2001]
체 \(F=\mathbb R\) 또는 \(\mathbb C\) 위의 벡터공간 \(V\)에서 노름(norm)은 함수 \(\|\cdot\|:V\to[0,\infty)\)로서 다음을 만족한다. \[ \|v\|=0\iff v=0,\quad \|\alpha v\|=|\alpha|\,\|v\|,\quad \|v+w\|\le\|v\|+\|w\|. \] 노름은 \(d(v,w)=\|v-w\|\)라는 거리를 만들며, 이 거리에서 수열의 수렴과 코시수열을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코시수열이 \(V\) 안의 어떤 원소로 수렴하면 \(V\)가 그 노름에 관하여 완비(complete)라고 한다. 완비 노름벡터공간이 바나흐공간(Banach space)이다.[HunterNachtergaele2001]
[완비성은 선택한 노름에 관한 정확한 조건이다. 예를 들어 \([0,1]\) 위의 다항식 공간에 최댓값 노름 \(\|p\|_\infty=\max_{x\in[0,1]}|p(x)|\)을 주자. 다항식 \[ p_N(x)=\sum_{k=0}^{N}\frac{x^k}{k!} \] 은 이 노름에서 코시수열이지만 \(C([0,1])\)에서의 극한 \(e^x\)는 다항식이 아니다. 따라서 다항식 공간 안에는 이 수열의 극한이 없고, 그 공간은 완비가 아니다.[HunterNachtergaele2001]]
일반적인 노름만으로는 두 벡터 사이의 직교를 정할 수 없다. 이를 위해 \(F=\mathbb R\) 또는 \(\mathbb C\) 위의 벡터공간 \(V\)에 내적(inner product) \(\langle\cdot,\cdot\rangle:V\times V\to F\)을 둔다. 내적은 양의 정부호이고 켤레대칭이며, 한 변수에서는 선형이고 다른 변수에서는 켤레선형이다. 실수 벡터공간에서는 대칭인 쌍선형 형식이 된다. 내적은 \[ \|v\|=\sqrt{\langle v,v\rangle} \] 로 노름을 만들고, \(\langle v,w\rangle=0\)이면 \(v\)와 \(w\)가 직교(orthogonal)한다고 한다. 이 유도된 노름에 관하여 완비인 내적공간을 힐베르트공간(Hilbert space)이라고 부른다.[HunterNachtergaele2001]
[힐베르트, 에르하르트 슈미트, 프리제시 리스 등은 20세기 초 적분방정식과 구체적인 수열·함수공간을 연구하며 이 이론의 토대를 만들었다.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1927년 무렵 이 모델들을 현대적인 추상 복소 힐베르트공간의 틀로 통합하고, 이를 양자역학의 엄밀한 수학적 형식에 적용했다.
이 추상화가 어떻게 유한차원 기하학을 함수의 세계로 옮기는지는 푸리에 급수에서 잘 드러난다. 실수 힐베르트공간 \[ H=L^2([-\pi,\pi];\mathbb R),\quad \langle f,g\rangle=\int_{-\pi}^{\pi}f(x)g(x)\,dx \] 를 생각하자. 여기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값이 같은 함수들을 같은 원소로 본다. 함수들 \[ e_0(x)=\frac{1}{\sqrt{2\pi}},\quad e_n^c(x)=\frac{\cos(nx)}{\sqrt{\pi}},\quad e_n^s(x)=\frac{\sin(nx)}{\sqrt{\pi}}\quad(n\ge1) \] 은 \(H\)의 정규직교기저를 이룬다. 여기서 ‘기저’는 앞 절의 하멜 기저와 뜻이 다르다. 이 함수들의 유한 일차결합만으로 \(H\)의 모든 원소를 정확히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유한 선형생성공간이 \(H\)에서 조밀하다는 뜻이다.[HunterNachtergaele2001]
따라서 모든 \(f\in H\)에 대하여 \[ S_Nf=\langle f,e_0\rangle e_0+ \sum_{n=1}^{N}\left(\langle f,e_n^c\rangle e_n^c+\langle f,e_n^s\rangle e_n^s\right) \] 는 유한차원 삼각다항식 공간으로의 직교사영이고, \[ \|f-S_Nf\|_2\longrightarrow0 \] 이다. 또한 \[ \|f\|_2^2= |\langle f,e_0\rangle|^2+ \sum_{n=1}^{\infty}\left( |\langle f,e_n^c\rangle|^2+ |\langle f,e_n^s\rangle|^2 \right) \] 가 성립한다. 이것이 이 경우의 파르세발 등식(Parseval's identity)이며, 정규직교좌표에 대한 피타고라스 정리의 무한차원 형태이다. 신호 해석에서는 \(\|f\|_2^2\)을 에너지로 해석하기도 한다.[HunterNachtergaele2001]
좌표를 버리고 공리가 남다
벡터공간의 역사는 한 번의 발명으로 흩어진 모든 사례가 즉시 통합된 이야기가 아니다. 연립방정식과 기하학, 함수와 미분방정식에서 발전한 여러 선형적 방법이 그라스만과 페아노의 이른 일반화를 거치고, 20세기 초 대수학과 함수해석학의 필요 속에서 공통된 언어로 정착한 과정이다. 이 언어 안에서 같은 체 위의 유한차원 벡터공간은 차원으로 분류되고, 다항식이나 함수의 해공간에도 기저와 좌표라는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이 연재에서는 이러한 수학적 조작을 사례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전혀 달라 보이는 대상들에서 공통된 연산과 법칙을 분리하고, 그 법칙을 만족하는 모든 사례에 적용되는 이론을 세우는 과정이다. 다만 추상화가 대상의 모든 성질을 보존하는 것은 아니다. 벡터공간으로 추상화할 때는 덧셈과 스칼라배를 남기지만, 다항식의 곱셈이나 함수의 노름 같은 정보는 별도로 지정하지 않는 한 잊힌다. 어떤 구조를 남기고 어떤 구조를 버렸는지 밝히는 일이 추상화의 정확성을 결정한다.
무한차원 해석으로 넘어가면 대수적 벡터공간 구조만으로는 극한과 무한급수를 다룰 수 없으므로 노름, 완비성, 내적을 추가해야 했다. 여기서 추상화는 좌표를 단순히 지우는 작업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에 필요한 구조를 정확히 골라 공리로 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극한 개념이 오늘날처럼 정교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 여러 수학자의 손길이 필요했다. 부등식을 이용한 해석학의 엄밀화는 코시, 리만, 바이어슈트라스(Karl Weierstrass) 등을 거치며 발전했고, 특히 바이어슈트라스의 강의는 오늘날의 \(\varepsilon\)-\(\delta\) 언어를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전적인 거리 개념을 어디까지 추상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극한에 관한 성질이 어떻게 공간을 규정하는 정의가 되는지는 7부에서 이어 살펴본다.
참고문헌
- [Dorier1995] Dorier, J.-L. (1995). “A General Outline of the Genesis of Vector Space Theory.” Historia Mathematica, 22(3), 227–261. https://doi.org/10.1006/hmat.1995.1024.
- [Moore1995] Moore, G. H. (1995). “The Axiomatization of Linear Algebra: 1875–1940.” Historia Mathematica, 22(3), 262–303. https://doi.org/10.1006/hmat.1995.1025.
- [Grcar2011] Grcar, J. F. (2011). “How Ordinary Elimination Became Gaussian Elimination.” Historia Mathematica, 38(2), 163–218. https://doi.org/10.1016/j.hm.2010.06.003, arXiv:0907.2397.
- [Crowe1994] Crowe, M. J. (1994 [1967]). A History of Vector Analysis: The Evolution of the Idea of a Vectorial System. Dover Publications. Google Books.
- [Teschl2012] Teschl, G. (2012). Ordinary Differential Equations and Dynamical Systems. Graduate Studies in Mathematics 140,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https://doi.org/10.1090/gsm/140,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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